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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Them)> 조이스 캐롤 오츠 - ★★★★★
수 백 페이지가 되는 이 장편소설을 읽은 내가 대견하다. 내용은 지루할 정도로 밋밋한데 왠지 모를 찝찝함 때문에 끝까지 읽어낼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들뜬 소녀 로레타는 남자친구 버니멀린과 사랑을 나누는데, 간밤에 뜬금없이 오빠 브록이 쏜 총에 맞아 버니가 죽게 된다. 이 사실을 짐작하고 어쩔 줄 모르는 로레타를 현장에 출동한 젊은 경찰 하워드 웬들(로레타는 남자를 좋아하지만 어투를 봐서는 그는 그녀의 이상형과 거리가 아주 멀다)이 강제로 범하면서 그녀의, 혹은 웬들가의 기구한 인생살이들이 시작된다.
로레타는 웬들과 어느 한 시골마을로 가 살면서 아들 줄스와 딸 둘(모린과 베티)을 낳게 된다. 웬들은 모르는 이야기지만 독특한 성격으로 보아 줄스는 버니의 자식인 것 같다. 줄스는 항상 고향을 떠나고 싶어하고 모험적이면서 어느 순간 불에 현혹되기도 한다. 모린은 어려서부터 이런 줄스를 동경한다. 로레타는 늘 동네 여자들과 남자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 로레타는 웬들이 죽고 여러 남자를 만난다. 막둥이로 랜돌프도 낳는다.
줄스는 어려서 검둥이들과 어울리며 방황하기도 하고 조금 커서는 가끔 집에 돈을 벌어다 주기도 한다.(모린은 이 모습마저 동경한다.) 하지만 그 돈이 적법한 돈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다 줄스는 자신과 환경이 너무나도 다른 소녀 네이딘에게 푹 빠지게 되는데 그 사랑이 결코 온전치만은 않다. 네이딘을 가까이 하기엔 뭔가 위험한 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던 줄스는 결국 네이딘에 쏜 총에 맞아 죽을 뻔도 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다. 이후 줄스는 다른 연인을 성매매 시키거나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에 휘말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모린은 늘 책을 읽는다. 지옥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책 속에 답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모린은 어린 시절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남자에게 성을 파는 걸 의붓아버지에게 들켜 두들겨 맞는다. 모린처럼, 소설 속 여자주인공들은 대부분 성에 관련된 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데 그게 잘못된 줄 모르고, 혹은 너무 잦은 폭력에 무감해진 상태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폭력을 가한 남자들에게 늘상 의지한다. 아마 모린이나 로레타, 네이딘 모두 다를 것 없이 남자들의 폭력 때문에 본인 삶을 영영 잃은 것 같다.(로레타는 모린이 자신과 닮아서 애증을 갖는다. 베티에겐 신경을 잘 안쓰는데 모린은 뭘 해도 괜히 미워한다.) 모린은 자신에게 F를 준 오츠 교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썼다가 답장을 받고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소설의 시작도 바로 이 편지다.(오츠는 이 책의 저자를 투영한 인물이다.) 망가진 모린은 결국 자신이 너무나도 원하던 중산층 유부남과 결혼한다.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기분이 너무나도 음울해진다. 마치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등장인물들에 동조돼서 기운이 쭉쭉 빠지고 내 영혼까지 더럽혀지는 듯 하다. 아래 몇 문장만 읽어도 이 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이동생 모린에 대해서는 이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으니 모린은 구원 받았다. 그는 로레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길에서 땅딸막하고 시끄러운 여자를 보고 로레타를 떠올릴 때만 예외였다. 그가 이렇게 모든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혀. 그는 보도블록 틈새를 뚫고 몸부림치며 1미터 안팎까지 자라는 잡초와 같았다. 그런 잡초들은 잔인함이나 계획이 없었으며, 아무 생각없이 주어진 현실에 만족했다. 공터의 잡석더미 속에서 잡석들 옆을 에둘러 자라는 잡초 같기도 했다. 그런 풀들은 의식이 없는데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 아무런 계획이나 설계도가 없는 잡초들이 더 영원했다.'
거의 두 달을 꼬박 이 책을 읽었다. 웬들 일가의 일생을 담은 대서사시인데 신기하게도 그 스토리가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히 기억난다. 마치 내가 그들의 삶을 살아낸 것 같이 말이다.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번역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다. 책 소개에 보면 '역사의 수면에 떠오르지 않고 가라앉은 일상들을 세밀히 기록하여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공적인 역사의 한 장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그렇다. 난 그냥 소설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정말 그 시대에 내가 들어가있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 수많은 일들이 역사책에 어떤 식으로 기록되었을진 전혀 알 수 없지만 소설로 이정도 현실적인 감흥을 만들어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런 찝찝한 간접경험을 갖게 된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선물이 되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도 의미있는 책 한 권이 될 것 같다. 더러운 인생 몇 개를 살아낸 듯한 기분이다. 회의감도 들고 잘 살아야겠단 생각도 들고.. 복합적인 감정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책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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