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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장강명 - ★★★★★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난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내가 리디북스를 사고 읽은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든 책이다. 저자가 기자출신이라 문장이 쉽고 간결해 잘 읽히는 것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소설의 표제어인 '표백'이라는 단어다. 책에서 따온 위 문장들처럼 우리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도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어떤 획기적인 생각도 이전에 있었던 발견과 발명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 살고 있다. 그 누구도 이를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없고, 그 안에서 그나마 좀 한다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이미 정해져있는 '정답'으로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접근하는 것(더 빨리 하얘지는 것) 뿐이다. 이를 뒤집어 더 (살기)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방법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걸까?
진짜로 그렇다. 여느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만의 회사를 차려 성공신화를 이루는 사람들, 역경을 딛고 일어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우리 모두 피나는 노력을 해야하는가? 그런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꿈인가? 누구든 그만큼 노력했으면 얻을 수 있는 성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새하얀 세상 중에 어느 한 곳에서 국소적으로 그런 성공이 일어난다면, 그는 우연일 뿐 전체가 하얗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 있었던 혁명에 비하면 지금의 작고 많은 시위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시대에서는 혁명도 하얀 세상을 흐릴 수 없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당연하게 하얗게 되고자 할 뿐이다. 그게 바로 '표백'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매달려도 가질 수 없는 거라면, 나는, 우리 젊은 세대는 어떻게 해야할까? 혁명으로도 바뀔 수 없는 세상이라면, 불행한 삶을 비관해 자살해야 하나? 하지만 나 하나 죽는다고 해서, 아니 젊은이들 몇 명 죽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빚 갚기 버거워서 그랬다고, 일이 힘들어서 그랬다고, 사업이 망해서 그랬다고, 공부가 어려워서 그랬다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젊은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여론은, 그렇게 떠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자살은 사회에 어떤 혁명적인 영향도 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인 '세연'은 세상을 바꿀 선구자가 되기 위해 어떤 것도 아쉬울 게 없는 상황에서 자살한다. 그것도 깊은 물에 빠져 살아나올 수 없었다는 얘길 듣지 않기 위해 팔만 뻗으면 얼마든지 숨쉴 수 있는 아주아주 얕은 물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노라고' 대놓고 보이며 말이다. 이 후 남은 친구들은 '세연'의 의도에 따라 무엇도 아쉬울 게 없는,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서 '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com)'에 '난 이런 부조리한 사회가 맘에 들지 않아 자유의지로 죽는 거다'라고 일종의 자살선언을 남기며 하나씩 죽게 되는데...
이쯤되면 주인공 중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성공한 사람의 자살 퍼레이드'이라는 극단적인 메시지로 지금의 세태를 따끔히 비판한다. 과연 우리보다 이뤄낼 게 많았던 이 전 세대들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열정이 없다고' 비난할 처지인가? '나 때는 이랬다고' 조언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이 이렇게 다른데 말이다. 물론 그들과 싸우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젊은 세대건 이 전 세대건 간에 이 책을 꼭 읽고서 무언가를 하나씩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이 말하는 내용이 너무나 뇌리에 꽂혀서 읽은지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주제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내게 너무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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